
인간은 자신에 대해 정직해질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얘기할 때면 언제나 윤색해진다. 이 영화는 그러한, 즉 자신을 실제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이기주의는 인간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죄악이다.
우리는 어디까지 타인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혹은 믿는다고 말할 수 있나. 성서학에서, 우리 인간은 본디 "원죄"를 갖고 태어나며 그 죄의 기원은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 말한다. 이기적 욕망. 자기 자신의 본위만을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연약하다. 그렇기에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낸다. 도달하지 못하는 그 간극을 메우기위해 거짓을 말한다. 현실은 척박하기에 거짓말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나생문\(라쇼몬\)>은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집 「나생문」1 중 「나생문」과 「덤불 속」을 전신으로 하여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만든 필름이다. 액자식 구성으로 나생문 밑에서 비를 피하는 세 명의 인물들 중 "나무꾼"의 이야기에 의해 서사가 진행된다. 하지만 "숨은 서술자"들 사무라이, 산적, 아내. 마지막으로 나무꾼의 진술이 엇갈리면서 사건은 혼란에 빠진다. 그들의 증언은 일관성이 없었으며 결국, 진실은 하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각자의 욕망이 거짓을 만들어 내는 순간이다. 진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은 그들의 증언은 자신마저 속여 버릴 만큼 강력하다.
한편, 소설 「나생문」은 노파와 하인의 대화로 서사가 진행된다. 시체를 훼손하고 있는 노파를 본 하인이 그녀에게 이유를 묻자 가발을 만들어 팔려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여자는 뱀을 건어로 속여 판 여인" 이며 여인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뱀을 건어로 속여 팔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노인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행동도 잘못이 될 수 없다”면서 그걸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말한다. 그리고 노인과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하인이 "살기 위해" 노인의 옷을 벗기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의 이것이 영화 속 마지막 하인과 나무꾼의 대화에서 나타난다. 아이의 비단옷을 가져가려는 하인을 보고 나무꾼은 그를 제지하지만, 그 자신도 고가의 단도를 훔치기 위해 위증을 하는 모습에서 이기적 인간의 모순된 욕망을 표현한다.
제작된지 반세기가 지난 영화이지만 여전히 소설 속 헤이안 시대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그것은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여전히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 중유(中有)의 세계에서 우리는 평생을 헤엄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것을 나생문(라쇼몽)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한다. 본래 방어 목적인 나성문(羅城門)으로 쓰였던 것이 헤이안 시대말에 시체나 사생아를 버리거나 도둑이나 반역자들이 숨어들면서 살아 있는 것을 잡아들인다는 의미인 나생문(羅生門)으로 불렸다. 「덤불 속」은 나생문의 그것과 다름없다. 그 이유는 나생문의 전신인 나성문(羅城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성(城)에는 본래 "가시나무로 둘러싼 울타리"의 뜻을 가지며. 그렇기에 나생문(나성문)의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덤불 속이며. 사람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길을 잃는다.
감독은 두 가지 단편의 이러한 공통점을 섞어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원작 「덤불 속」의 주제가 “진실의 진위(眞僞)”에 대해 초점을 맞추었다면, 영화의 주제 의식은 “과연 우리가 믿을만한 진실이란 존재하는가”로 옮겨간다. 또한 덤불 속에 숨어있던 나무꾼을 나생문으로 끌고 나옴으로써 다시 말해, 그를 통해 "덤불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영화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서술자에 대한 의심까지도 관객에게 결단을 내려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며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나와 다른 사람을, 타인을 믿는 데에서 기인한다. 인간이 인간을 믿지 못할 때 그곳은 지옥이 될 것이라던 영화 속 승려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시작은 인정에서부터 시작한다. 결국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으로서 덤불 속을 헤쳐나가는 연약한 미물이기에.